1910년 한일합방 포고문 찢고, 부당함 주장
감옥으로 이송 도중 일본경찰 척살하고, 30년간 은둔
객관적 자료 불충분으로 독립유공자 선정 수차례 탈락  

이철영 선생의 생전 모습. / 사진 독립기념관
이철영 선생의 생전 모습. / 사진 독립기념관

[충청뉴스라인 방관식 기자] 104주년 3.1절을 맞아 서산사람들이 기억해야할 독립투사가 있다. 경술국치 당시 서산경찰서 게시판에 붙은 ‘한일합방 포고문’을 찢어버린 이철영(1884~1945) 의사가 그 주인공이다.

자료와 증언에 따르면 이철영 의사는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공고문이 서산경찰서에 붙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길로 달려가 공고문을 찢어버리고 한일합방의 부당함을 주장하다 체포돼 고초를 겪었다. 

이후 공주감옥으로 이송되던 중 홍성군 금마면 인근에서 호송하던 일본경찰 재등상웅(순사부장)을 죽이고 탈출에 성공, 동문수학했던 구문도(당진군 정미면)의 집으로 피신했다. 

계룡산과 지리산 등에서 10여 년을 숨어 지낸 이철영 의사는 이의영으로 개명한 후 당진군 송악면 기지시리에 서당을 열고, 30여 년간 후학들에게 민족정기를 전파하다 1945년 2월 서거했다. 광복을 불과 6개월 남긴 시점이었다.

서산시청 인근에 세워져 있는 이철영 의사 추모비.
서산시청 인근에 세워져 있는 이철영 의사 추모비.

당시 서산지역에서는 장례를 군민장으로 치르고, 이철영 의사의 숭고한 정신을 기렸다. 또한 1960년에는 지역 유림이 시청 앞에 추모비를 세워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현재 이철영 의사는 독립유공자가 아니다. 고향인 음암면을 주축으로 20여 년 전부터 수차례에 걸쳐 독립유공자 지정을 요청했으나 활동내용의 구체적인 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번번이 선정에서 탈락된 것이다.

실제로 독립기념관의 자료에도 ‘이철영은 음암면 문양리 출신으로 ‘한일합방문’을 찢어버리고 서산경찰서에서 합방의 부당성을 외치다 구금되었다. 공주감옥으로 이감 도중 일본인 순사부장 등 2명을 처단한 의사이다. 그러나 일본인 순사 처단 이후 계속해서 은거해 온 결과 그의 추후 행적은 남아 있지 않다. 서산지역에서 의사로 추앙받고 있으나 객관적 자료가 없어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고 기록돼있다.

민족전선음암대표 등이 작성한 이철영 의사 제문. / 사진 독립기념관
민족전선음암대표 등이 작성한 이철영 의사 제문. / 사진 독립기념관

최근 독립유공자 포상 기준의 완화와 서산시 시정연구 동아리 만세서산의 노력으로 2019년 유한종 선생을 시작으로 ▲김옥제(당시나이 28·성연·3.1독립만세운동·징역6월) ▲오인탁(30·운산·3.1독립만세운동·징역6월) ▲임낙현(41·서산읍내·3.1독립만세운동) ▲이기신(15·운산·독립선언서낭독·기소유예) ▲이주영(31·음암·3.1독립만세운동) ▲명태억(20·해미·독립선언서낭독·기소유예) ▲한명옥(32·성연·3.1독립만세운동·태형90도) ▲이명학(1899·해미대곡·3.1독립만세운동·태형90도) ▲성치근(1889·성연갈현·3.1독립만세운동·태형90도) ▲남명숙(1851·성연갈현·3.1독립만세운동·태형90도) ▲조순봉(1891·성연갈현·3.1독립만세운동·태형90도) ▲조재극(1897·성연갈현·3.1독립만세운동·태형90도) 선생 등이 새롭게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것을 감안하며 더욱 안타까울 뿐이다.

지난 2019년 만세서산 회원으로 활동했던 이재휘 회장은 “이철영 선생의 경우 지역 어르신들이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인물이지만 수형기록 등의 객관적인 자료가 없어 제대로 된 예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고 밝혔다.

이어 “역사 속에 묻힌 이름 없는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온전하게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서는 민간과 행정의 협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면서 “막연하고 형식에만 치우친 호국보훈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을 지속적으로 발굴해 시민들에게 누구를, 왜 추모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인식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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