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서는 안 될 일들 시를 통해 남기고 싶다” 

서산여성문학회, 서산시인회, 충남시인협회, 한국시인협회, 서산시낭송회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수진 스님은 구도하는 마음으로 산사 음식을 만들고 시를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서산여성문학회, 서산시인회, 충남시인협회, 한국시인협회, 서산시낭송회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수진 스님은 구도하는 마음으로 산사 음식을 만들고 시를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충청뉴스라인 방관식 기자] 23일 애송시를 듣기 위해 산사에서 만난 수진 스님은 ‘개심사의 범종’이란 시가 적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누가 스님 아니랄까?’하고 찬찬히 읽어 보니 예상과는 다르게 아픈 과거의 역사가 담긴 시였다.

“일본 우익단체들의 반대 시위로 평화의 소녀상 전시회가 결국 철수했다는 소식을 접하는 순간 잊고 있었던 수십 년 전의 일이 기억났습니다. 개심사에 참회의 종을 시주한 일본인이 있었다는 것을요”

기억의 창고 속에 뽀얀 먼지가 쌓인 파편들을 되살려낸 수진 스님은 시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40여년전 자신이 정성껏 준비한 시래기 된장국을 좋아했던 한 일본인이 흘린 눈물의 의미를 어리석은 중생들에게 알리고자 했던 마음이 너무나 컸던 탓이다. 

2015년 계간 문학청춘 신인상으로 정식 등단했지만 시와의 인연은 그보다 훨씬 더 오래전에 시작됐다. 동자승 시절 유명 시인이 ‘중아 중아 까까중아! 충청도 아줌마 젖 먹고 무럭무럭 자라라’하고 시를 지어준 것이다.

수진 스님은 부처님의 제자가 된 것이나 시를 쓰게 된 것이나 그저 업보라고 했다.   

공저시집 ‘그때 그 자리에 있겠다는 것’, ‘시인 & 서산’ 등에 작품을 선보이며 구도하듯 시를 쓰고 있는 수진 스님은 한 가지 욕심 아닌 욕심이 있다며 수줍게 웃었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 이제는 범종과 관련된 사연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소중한 역사가 이렇게 사라지는 것이 서운해 혼자 개심사 근처에 ‘참회의 길’을 조성해 보면 좋겠다고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리 허황된 욕심만은 아니겠지요“
  
개심사의 범종

오카모토 유카에 의해 일본 신주쿠 세션 하우스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평화의 소녀상 전시회가
우익단체들의 반대 시위로 결국 철수되었다는 소식이 지면을 채우던 날

칠흑의 쇠 벽을 뚫고 나온 뇌동 끝에
흘림체로 나부끼는 나비의 비상

종각 위 구름 한 조각이 역사의 한 장면을 기억해내고 있었다

참회가 구름처럼 흘러나와 후드득 꽃비로 떨구던 노신사
우에다 씨의 눈물
그 선한 사람이 자국민이었다는 사실을 우익단체들은 알기나 할까

태평양 전쟁 당시
산사의 종은 물론 민가의 쇠붙이들까지 공출시켜
무기를 제조해 살상한 영혼의 안식처로
선뜻 개심사에 참회의 종을 시주한 일본인

덩그렁 덩그렁 그 울림 울림은
침략자의 죄올시다
아비의 죄올시다
전쟁의 죄올시다

설판재자(設辦齋者)*
상전(上田) 조웅(照雄)
상전(上田) 조장(照章)
상전(上田) 진수(秦樹)
이름 여섯 자만 남긴 종

어처구니없게도 
연대 조수의 기록조차 없는 범종을 보며
일천구백칠십칠년 숫자를 머릿속을 헤집어 꺼내놓는 손끝이 아리다

노랑나비
흰나비
호랑나비
희망나비
기억 나비가
푸른 눈물이 되어
떨어지는 영혼을 보았음일까

허다한 산사 다 제쳐놓고 개심사에 설판재자로 선뜻 나선
머리가 희끗희끗했던 순례자

그를 위해 시래기 된장국에
마음 한 조각 띄워주었을 뿐인데
이별고개에서 손 한번 흔들어주었을 뿐인데

참회의 회안을 밟고 돌아서던 세심동
자박자박 지름길로만 남았네

눈물보다 맑고 순한 종소리
에밀레종보다 거룩한 종소리
우레와 같은 분노의 종소리
가슴을 저미는 참회의 종소리
두 손 마주잡는 화해의 종소리
시공을 뛰어넘는 평화의 종소리가
여기에 있음을

 
*설판재자(設辦齋者): 한 법회의 모든 비용을 마련하여 내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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