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남자가 사는 법] 춤에 미쳐 춤과 결혼한 Ly댄스아카데미 박상모 원장

▲ 지난 12일 인터뷰가 끝난 후 공연 연습에 한창인 제자들과 함께한 박상모 원장. 어린 제자들이 춤을 통해 숨겨진 열정을 찾고, 그 동력으로 최선을 다하는 인생을 사는 방법을 가르치고 싶은 것이 박 원장의 궁극적인 목표다.

[충청뉴스라인 방관식 기자] 12살 꼬마는 막연하게 춤이 좋았다. 그러다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에 매료돼 춤에 미쳤고, 불혹이 된 지금도 춤과 함께 살고 있다.
평생을 춤꾼으로 살아온 Ly댄스아카데미 박상모 원장은 10대 시절 최재훈, 영턱스클럽, 터보 등 당대 최고 가수들의 백댄서로 활약한 화려한 이력의 소유자다.
“고등학교 때 댄스팀 ‘ZEST(열정)를 결성해 서산시 대회에 나가서 우승을 차지했죠. 그 후  유명 작곡가에게 발탁돼 인기가수들의 백댄서로 활동하며 TV에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그때가 19살이었는데 무대에 서는 것만으로도 세상 모든 것을 가진 것 같았습니다”
그 후 박 원장은 백댄서에 만족하지 않고, 모 기획사의 아이돌 그룹에 들어가 요즘 말하는 연습생 생활을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독학으로 배운 탄탄한 춤 실력과 백댄서로 활동하면서 쌓은 경험 등 조금만 더하면 무대의 주인공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호사다마라는 옛말처럼 가장 좋을 때 가장 큰 불행이 찾아왔다. 기획사 대표에게 사기를 당한 것이다.

▲ 고향 서산에 댄스아카데미를 막 열었을 때인 10년 전의 박상모 원장. 40이 된 지금도 박 원장은 여전히 춤에 미친 춤을 사랑하는 남자다.

날카로운 상처를 안은 채 고향인 서산에 내려왔어도 박 원장은 씩씩했다. 옛 동료들과 다시 춤을 추면서 꿈을 이어갔다. 그러나 천생 춤꾼인 그에게도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서운 현실이었다고 한다. 춤은 돈이 되지 않았고, 어른은 돈이 필요한 것이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제대 후 경제적인 이유로 회사에 들어갔지만 사무실 생활이 도무지 적성에 맞지 않았습니다. 머리는 이래서는 안 된다고 말리는데 심장은 춤 출 때처럼 빨리 뛰었습니다. 결국 짐 싸들고 다시 서울로 올라가게 됐죠.

 

화려했던 춤 인생 1막에 비해 2막의 시작은 초라했다. 제법 관심을 끌었던 백댄서와 그냥 춤을 추는 사람은 확연히 달랐다. 목표도 대폭 수정해야만 했다. 좋아하는 춤을 더 오래 추고 싶었기에 화려한 무대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는 꿈 대신 후배들을 양성하겠다는 새로운 목표를 갖게 된 것이다. 물론 이런 혼돈의 시간 속에서도 춤은 항상 인생의 중심에 서 있었다.
방송댄스를 비롯해 각종 자격증을 취득한 박 원장은 춤에 대한 고래힘줄 같은 고집으로 지난 2009년 댄스학원이라면 사교댄스를 배우는 곳으로만 인식되던 불모지(충청남도 서산시)에 과감하게 간판을 내걸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춤을 추고 있다.
변한 것이 있다면 화려했던 백댄서 시절에는 몇 안 되는 동료들이 전부였지만 지금은 셀 수 없는 많은 제자들과 함께한다는 것.

▲ 10주년을 맞은 Ly댄스아카데미는 지난달 9일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하는 자선공연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며 지역을 대표하는 댄스아카데미의 위상을 더욱 굳건히 했다.

“시작이야 초라했죠. 처음에는 딸랑 10명 모아놓고 춤을 췄으니까요, 하지만 진심으로 원하고, 그만큼 노력하면서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각종 대회에서의 입상과 예술관련 학교 진학 등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기쁜 것은 춤을 통해 아이들이 숨겨진 자신의 열정을 찾아내고 있다는 것이죠”
박 원장은 아이들에게 화려한 환상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자신이 이미 어린 시절 고스란히 겪어본 탓이다. 대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갈 것을 주문한다.

▲ 벽면을 가득 메운 상장과 트로피들. 박 원장과 제자들의 노력을 보여주는 증거다.

춤을 통해 진정으로 최선을 다한 자에게는 후회란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박상모 원장. 그의 화려한 춤 인생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그렇기에 앞으로 10년, 20년이 지나도 그와 춤 이야기를 계속할 수 있을 것이란 즐거운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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