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박첨지놀이보존회 이태수 회장 “제2, 제3의 박첨지가 활개 치는 세상 만들고 싶어”

▲ “코흘리개 시절부터 숱하게 마주한 박첨지지만 지금도 볼 때마다 새롭게 느껴진다”는 이태수 회장은 “양반사회의 모순을 통렬하게 풍자하는 박첨지놀이는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정화(카타르시스) 작용을 느끼게 한다”고 말했다.

[충청뉴스라인 방관식 기자] 지난 2019년 취임한 박첨지놀이보존회 이태수(56) 회장의 뇌리에는 코흘리개시절 어머니 등에 업혀 보았던 인형극의 강렬했던 인상이 아직도 깊게 새겨져 있다.

철이 들어 인형극에 나오는 하얀 수염을 휘날리는 할아버지가 박첨지라는 것을 알게 됐을 때만해도 이렇게 질긴 인연이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지만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50년 동안 얼굴을 마주보는 사이가 됐다.

▲ 지난 2016년 서산시 음암면 탑곡고양동1길 113-9에 개관한 서산박첨지놀이 전수관.

21일 서산박첨지놀이 전수관(서산시 음암면 탑곡고양동1길 113-9)에서 만난 이 회장은 모든 것이 운명이라고 했다. 외할아버지(주연산 선생·1903~1993)가 서슬이 시퍼런 일제의 민족문화말살 정책에 맞서 박첨지놀이를 지켜온 것이나 이 회장의 스승인 김동익 선생이 생기는 것 하나 없는 인형극을 위해 평생을 바친 것도 그저 운명이라는 것이다.

알 수 없는 운명의 힘은 결국 서른 살의 청년이 손에 인형을 쥐게 만들었고, 앞선 두 사람처럼 평생을 박첨지로 살게 만들었다.

“평생을 박첨지로 살아오면서 명맥을 잇기 위해 노력하신 두 분 덕택에 지금의 박첨지놀이가 있는 것입니다. 앞선 두 분의 수고가 헛되지 않도록 박첨지놀이를 보존하고 계승하는 것이 제 운명 같습니다. 주연산·김동익 선생님께서 하늘나라에서 도와주시리라 믿습니다”

▲ 지난 2012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포즈를 취해주고 있는 고 김동익 선생. 김동익 선생은 2018년 작고하기 바로 직전까지 무대에 서는 열정을 보였다. 주연산 선생에게 김동익이란 박첨지가 있었듯, 김동익에게는 이태수라는 박첨지가 있다.

해방 이후 일제에 의해 사라졌던 우리 고유의 문화를 부활시키는 정책에 따라 박첨지놀이도 한때 반짝 인기를 누렸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시대가 흐르고, 옛 전통은 구태의연하다는 편견이 만연하면서 박첨지놀이도 다른 전통문화들과 함께 설자리를 잃어갔다.

하지만 “내가 박첨지다”라면서 잘못된 시대의 조류에 역행했던 선각자들이 있었기에 박첨지놀이는 현재 부활을 넘어 비상을 준비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지난 2000년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26호에 지정되고, 2016년 서산박첨지놀이전수관까지 개관하면서 척박한 토양에 굳건하게 뿌리를 내린 것이다.

▲ 올해 열린 제4회 ‘서산박첨지놀이 인형극 축제’는 코로나19로 인해 유튜브 방송으로 중계됐다.

인간을 흉내 내는 로봇까지 나온 첨단시대에 “별다른 움직임도 없는 막대 인형이 얼마나 대단할까?”하는 의아심을 갖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박첨지놀이는 해외에서도 인정받는 무형문화재다. 동아시아 4개국 인형극 학술대회에서 세계적인 인형극 대가들이 박첨지놀이의 단순함과 질박함에 매료돼 찬사를 보낸 것이 이를 증명한다.

특히 고려시대부터 지금까지 수백 년이란 긴 시간을 한 마을(음암면 탑곡4리)의 주민들이 원형 그대로 이어왔다는 사실은 전 세계 어느 유명 인형극도 갖지 못한 박첨지놀이만의 놀라운 기록이다.

물론 앞으로 헤쳐 나가야 할 문제점도 많다. 정회원 9명, 준회원 4명으로 이뤄진 단원들은 80대를 넘긴 고령이 3명이나 되고 나머지도 만만치 않은 나이다. 갈수록 줄어드는 농촌 인구를 감안할 때 언제까지 탑곡4리 주민들로만 박첨지놀이를 무대에 올릴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

그래도 이 회장은 씩씩하게 돌파구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전수관 개관 후 단원들과 의기투합해 매년 30회 이상의 공연을 실시하고 있으며 서산이라는 지역적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각종 공모사업에 도전했다.

▲ 수백 년째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박첨지놀이는 박첨지 유람거리, 평안감사 마당, 절 짓는 마당으로 진행된다.

이 결과 지난 2018년에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후원하는 '신나는 예술여행' 사업에 선정돼 전국 10개 도시에서 박첨지놀이를 선보였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서산박첨지놀이 인형극 축제’를 4회까지 개최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박첨지놀이를 각인시켜가고 있는 것도 큰 성과다.

여기에 전수관을 2층으로 증축해 체험장도 만들고, 탑곡4리를 인형극의 본고장으로 만들기 위한 아름다운 마을 조성과 야외공연장 건립 등 앞으로 해야 할 일도 차곡차곡 만들어 놨다.

코로나19로 잠시 보류된 충남도무형문화재 보유자 심사에서 좋은 결과가 나오기를 바란다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 이태수 회장에게는 꿈이 있다.

“선배 박첨지들이 그랬던 것처럼 저도 최선을 다하다 때가되면 자랑스럽게 새로운 박첨지에게 제 자리를 물려줄 겁니다. 그때까지 이루고 싶은 꿈이 하나 있는데 세계전통 민속인형축제를 탑곡4리에서 개최하는 것입니다. 물론 어렵겠죠. 그래도 노력하겠습니다. 지켜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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