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시 김상정·유흥수 선생 생가, 무관심 속 방치
관련 유적 체계적인 보존 위한 조례 제정 등 시급

[충청뉴스라인 방관식 기자] 일제의 국권침탈에 항거하며 서산인의 애국심과 기개를 드높였던 독립운동가의 생가가 폐허로 방치되고 있어 대책마련이 시급한 실정이다.

부끄러운 현장은 성연면 고남리 김상정 선생의 생가와 운산면 고산리의 유흥수 선생 생가 등 2곳. 관련 법률과 현실적인 문제 등 넘어야 할 산이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무관심.

아무도 독립운동가의 발자취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 사이 마지막 남은 이들의 자취는 사그라지고 있다.

이들이 이대로 기억 속에서 사라져야할지 결정하는 것은 시민의 몫이다. 그 선택을 돕기 위해 지난달 30일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을 찾아봤다.     

김상정과 유흥수 그들은 누구인가?

▲ 평생을 항일 투쟁에 바친 김상정 선생. 사진=국가보훈처

1875년(고종12) 부석면에서 태어난 한월당 김상정 선생은 평생을 항일 투쟁에 바친 인물로 서산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다.

국가보훈처의 자료에 따르면 1919년 1월 고종황제가 승하하자 발상문을 작성해 면사무소 게시판에 게시하고 홀로 발상했다.

이어 3월 23일 해미면에서 3·1독립만세시위가 일어난 것을 계기로 일경이 민심을 회유하기 위해 면민대회를 개최하자 참석자들에게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환기시키고, “불납세(不納稅)는 물론 왜왕의 명령에 맹세코 복종할 수 없다”며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작성해 조선총독에게 발송했다.

이후에도 김상정 선생의 의로운 행동은 계속돼 같은 해 9월 호별세 징수에 반대해 왜왕과 총독을 꾸짖는 혈서를 보냈다. 1921년에는 혹심한 전매령에 항거해 ‘대한유민(大韓遺民) 김상정 종불굴초(種不屈草)’라는 팻말을 만들고, 담배를 재배했다.

이에 왜경이 벌채를 명하자 “더러운 소리를 듣지 않겠다”며 왼쪽 귀를 잘라 의지를 나타내기도 했다.

1937년에는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강제로 삭발과 상복을 벗기려하자 완강하게 저항해 혹독한 고문을 당했으며 이때의 후유증으로 1954년(만79세) 사망할 때까지 평생 허리를 쓰지 못했다.

일제는 온갖 악랄한 수단을 동원해 김상정 선생의 기개를 꺾으려 했으나 변치 않는 애국심으로 모든 고초를 이겨냈고, 정부는 이러한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82년에는 대통령 표창을, 1990년에는 애족장을 추서했다.

▲ 유흥수 선생의 학창시절 사진과 항일정신이 담긴 작품을 실었던 문예지 '반딧불'. 사진=국가보훈처

1921년 운산면에서 태어난 유흥수 선생은 대구사범대학교 재학 시절 선배들의 항일저항정신을 계승, 1939년 윤독회(輪讀會)를 조직했고 1940년 1월 민족의식과 항일정신을 고취하는 작품들을 실은 책 ‘반딧불’을 간행했다.

그 뒤 국제정세를 파악해 일제의 패망을 예견한 유흥수 선생과 동지들은 1941년 2월 항일학생비밀결사 단체인 다혁당을 결성해 보다 조직적인 항일투쟁을 계획하고 실천해 나갔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윤독회의 ‘반딧불’이 일경의 손에 들어가 체포됐으며 미결수로 2년 동안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1943년 11월 징역 5년형을 받고 복역 중 8·15 해방을 맞아 출옥했고, 정부는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유흥수 선생은 2016년(만95세) 사망했다)

폐가로 방치된 생가! 누구의 책임인가?

▲ 사람이 살았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폐가로 변한 김상정 선생 생가

성연면 고남리 825-2번지에 위치한 김상정 선생의 생가는 말 그대로 사람이 살았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폐가로 변해있었다.

또한 주변 어디에서도 이곳이 서산을 대표했던 독립운동가가 태어난 곳이라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람이 최근까지 거주했던 흔적이 남아있는 운산면 고산리 137번지의 유흥수 선생의 생가는 그나마 조그마한 팻말이라도 세워져 있어 이곳이 독립운동가의 생가임을 알 수 있게 했다.

현충시설의 지정·관리 등에 관한 규정 제5조에 따르면 국가보훈처장은 △국가유공자와의 관련성 △독립운동 또는 국가수호활동과의 관련성 △보존상태 △현재의 활용실태 및 향후 활용가능성 등을 고려해 현충시설로 지정할 수 있게 했으며 그 지정 여부에 관해 소재지를 관할하는 지방자치단체 또는 관계 행정기관과 협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법규보다 더 중요한 것도 있다. 생가복원의 경우는 후손의 의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 운산면 고산리의 유흥수 선생 생가. 최근까지 사람이 거주했다.

여기에 복원 가능성과 역사적·교육적으로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도 검토해봐야 할 대목이다.

그러나 지역의 관심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이 갖춰졌다 해도 헛수고가 될 확률이 높다.

후손 개인의 의지와 역량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독립운동가의 생가를 방치하고 있는 서산시의 지금 모습이 바로 그렇다.

그렇다고 서산시가 독립유공자 공훈(보훈) 사업에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2019년 독립유공자 묘 안내표지판 설치부터 2020년 독립유공자 기념비 QR코드 안내판 설치와 나라사랑기념탑 국가유공자 추가 명각을 완료했고, 독립유공자 의료비 지원과 유족 위문 등 다양한 사업을 진행해왔다.

특히 시정연구동아리 ‘만세서산’이 역사 속에 묻혀있던 독립운동가 16명을 발굴해 일괄 포상 신청을 한 결과 2019~2020년에 걸쳐 13명이 독립유공자로 선정되는 값진 결과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유독 독립운동가의 생가와 관련한 문제에서만은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취재 결과 소유자가 후손이 아닌 유흥수 선생의 생가와는 달리 김상정 선생의 생가는 후손이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 폐가의 지붕이 말끔히 수리된 의아한 모습을 보고 취재한 결과 최근 김상정 선생의 손녀인 김부용 여사가 생가가 더 이상 파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조치를 취한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김상정 선생의 손녀인 김부용 여사가 생가가 더 이상 파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최근 지붕을 보수하는 등 작으나마 희망을 갖게 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앞서 밝혔듯 지역의 관심이 없으면 이런 노력은 헛수고가 되고 만다.

또한 현충시설로 지정될 경우 주변지역의 개발·건축행위 등의 제한을 우려하는 인근 주민들의 반발도 넘어야할 산이다.

독립운동가의 생가 등 관련 유적에 대한 체계적인 보존을 지원할 조례 제정도 각종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꼭 하고 넘어가야 할 숙제다.

독립운동가의 생가가 무너져 폐허로 변한다고 해도 살아가는데 아무런 불편은 없다.

다만 이런 현실에서 독도와 위안부 문제, NO JAPAN 운동 등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하는 씁쓸함이 클 뿐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독립운동가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억하고 말고는 우리의 몫이다.

“당신의 선택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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