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안군 이원면 이순의(이서림)
가로림, 그 아리도록 투명한 명칭을 제대로 인식하게 된 계기는 하필 개발이라는 미명의 야만을 통해서였다.

새악시금, 이응작금, 큰 산, 줄려, 따녀, 벙구나무골, 여수바위골, 할미섬 등등으로, 모퉁이 하나하나마다 제각각의 특성이나 상황에 적절한 명칭을 갖고 있는 바닷가에서 태어나고 자랐던 까닭이었다.

그 시절에는 굳이 ‘만’이라는 지형적 특성을 들먹여야 할 이유나 필요가 없어서였을까?

마을 사람들 역시도 그저 바위 하나, 모퉁이, 모래밭, 나무나 짐승 등의 특성에 기댄 명칭으로 바다를 드나들며 크지 않은 ‘욕심’으로 갯것을 탐하며 살아갔다.

돌이켜보건대 가로림만에서 태어나 그 언저리에 머물렀던 시간들, 딱 그 세월만큼 가로림만과 떨어져 지내는 동안도 나의 삶은 가로림만과 무관하지 못했다.

생활반경 내에서 매순간순간으로 나의 호흡과 사념을 지배했던, 그 푸근하고 너른 마술 광야는 끊임없이 나의 일상 안으로 뛰어 들어와 배회했다.
 
바람과 햇살을 거쳐서, 밤사이 별빛 달빛이 거름을 쏟아냈던가?

자고 일어나면 또 다른 생명, 또 다른 갯것들이 가로림만을 채워나가는 모습은 늘 상 내게 의문이었다.

과학적 해양학적 지식으로 설명하는 사람이야 그게 뭐 그리 대수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그러한 지식적 사고로 가로림만을 설명하거나 이해하는 것에 나는 심한 거부감을 느낀다.

그러니까 내가 느끼는 가로림만은 인간이 사고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것이다.

신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신의 영역, 신의 존재가 바로 가로림만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인간을 포함하는 수많은 동식물들이 가로림만을 통해 먹이를 얻고 가로림만의 활동성에 심신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베풀고 생산하기를 반복하며 계절과 기상에 따라 끊임없이 격동하면서도 초지일관 자신의 할 일을 멈춰본 적이 없는 게 가로림만인 것이다.

그러한 가로림만이기에, 한갓 지구의 피조물 중에 한 종류인 인간이 가로림만의 숨통을 조이려는 시도 자체가 그 얼마나 불경스러운 일인가?

가로림만 조력댐 문제로 인해 내가 느끼는 절망감의 시원이다.
 
어느 순간은 축구공처럼 튀어 올랐다고 생각되거나, 암탉의 다리사이를 미끄러지던 알처럼 불쑥 내밀어졌다고 느껴질 때도 있었던.


바다 건너편 산봉우리 어디쯤에서 아침마다 탄생의 예식을 거듭하던 물체의 환영들이 그랬다.

그 형언할 수 없는 마술이 물결위에 선포되는 순간의 장엄함, 그리고 근원을 알아챌 수 없이 밀려드는 슬픔 같은 오한!

어느 날은 바지락을 캤고 어떤 날은 굴, 소라, 가제 파래 고시럭과 해후하는 꿈에서 깨어날 때마다 늘 상 아쉬웠던 건 가로림만 언저리 어딘가에서 비롯되는 바람의 숨결이었다.

알큰달큰 내음새를 풍기며 가로림만 구석구석을 떠돌아다니던 바람에 대한 간절함이었다. 바람의 품속을 향한 그리움이었다.  
 
그러니까 세상에 태어나 성장하는 동안 나는 가로림만의 바람과 가로림만의 하품소리, 기침소리, 재채기소리, 가로림만이기에 가능했을 수 없이 다양한 동작들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갔다.

날이 날마다 철이 철마다 제각각인 바람의 몸짓과, 바닷가 소나무 숲 사이사이를 거치며 다가와 코끝에 전달되던 생명들의 체취. 게다가 가로림만 상공을 유영하는 구름과 물안개의 춤사위에서부터 가로림만 물결위에 투영되는 하늘도화지의 무수한 그림들이라니!
 
그 모든 것들이 너무나 당연하다 못하여, 가로림만이 보여주는 행위들 모두가 나의 일상인지 일부분인지 전부인지 구별되지 못했다.

몸은 이쪽에서 이렇게 움직이고 있다 해도, 손끝에 닿을 듯 말 듯 누워 있는 가로림만은 나와 동행자이거나, 혹은 그림자일지 모른다고 여겨졌다.

그러다가 결국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 또한 고향을 떠나가 살게 되었고, 어떤 날 매스컴을 통해 날아든 가로림만은 섬뜩했다.

기름유출사건이 내게는 매스컴의 보도처럼 그렇게 단순하다 여겨지지 않음이었다.

그렇잖아도 고향을 방문할 때마다 속절없이 찬란한 문명과, 그 문명을 숭배하는 인간으로부터 침범당한 가로림만 이곳저곳이 소화불량처럼 불편해져 남몰래 가슴앓이를 치르곤 했었는데…!
 
분명 가로림만에 기름이 쏟아 부어진 건 아니었으나, 태안기름유출사건을 접하는 순간 뭔가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광란의 회호리가 가로림만을 향해 덮쳐올 것 같은 두려움이 몰려왔다.

악취가 진동하는 물결이 거대한 시멘트 구조물에 갇혀 신음하는 게 보였고, 무제한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사람의 파도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그 찬란한 문명적 배설물들을 마구 마구 내던지며 괴성을 지르고 발을 굴러댔다.

마치 화산분화구와도 같이. 그리하여 하품을 하듯 팔다리 쭈~욱 뻗어 드러누웠던 가로림만은 순식간에 쓰레기하치장, 하수처리장으로 변해버리는 환영이 자꾸만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 불길함은 예상대로 가로림만의 숨통을 조이는 사업계획으로 확전되었고, 당연하게도 자그마한 사심으로 바다를 드나들던 사람들의 마음에 던져진 돌멩이의 파랑이 시작되었다.

미끼가 물려있는 낚싯대와 낚시 바늘이 사방에서 사람들 마음속을 비상을 했다.

가로림만 조력발전소건설계획의 본질은 명료하다.

국가가, 국가의 이름으로 대기업에게 무상으로 가로림만을 넘겨주게 되는 것.

국내 전기 생산량의 절반 가까이를 축내는 정유공장과 기타 대기업 사업장에 일반전기료의 반값으로 전기를 공급하기 위해 화력발전소 증설이 필요한 서부발전은 교토의정서에서 명시한 습지보존 의무를 정면으로 위반하는 가로림만 파괴를 친환경적이라 우긴다.

그로 인하여 가로림만 내의 무수한 갯벌들이 -이미 많이 진행되어버리기도 했지만- 매립되어 대기업의 손아귀로 넘어갈 일에 공공성을 가장한 계략이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또한 지금까지 가로림만 문제를 다룬 그 어떠한 방송이나 언론매체에서도 가로림만 조력발전사업의 본질을 다루지고 있지 않다. 몰라서라기보다, 굳이 알려고 하지 않을뿐더러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나 할까?

내가 가로림만조력발전을 반대하는 이유는 거창하지 않다.

누구는 어민들의 생계 터전을 염려하고 또 누군가는 싱싱한 해산물의 부재를 걱정한다.

또한 어떤 이는 상상하기도 끔찍한 환경파괴의 재앙을 염려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이유나 문제의식과는 조금 떨어져서 가로림만을 바라본다. 
 
몇 년 전부터 이원면 내의 특정지역은 주민들 사이에서 바다 땅 갈라먹기가 진행되었다.

땅을 가르고, 주고받기를 진행하는 사람들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던 에너지. 그 ‘에너지’에 나는 관심이 많이 간다. 
 
나는 가로림만이 어느 특정인의 ‘소유물’로 전락하는 걸 원하지 않는다.

가로림만은 그 스스로의 가로림(加露林)으로 내버려 둬야 한다.

신의 숨통을 조이는 짓을, 적어도 동족인 인간이 저지르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내게 있다.

인간이 도달해야할 이상세계, 그 이상을 향한 염원이 인간에게 있다면 바로 가로림만의 모습일 것이라 믿기 때문에, 그런 이유로 가로림만 조력발전소 건설을 반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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